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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하여

글바치 2024. 11. 29. 08:32

“죽음”에 대하여
                                                “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싶다.”를 읽고

https://youtu.be/tTstuWR4Sqw

   저자 하시다 스가코는 한국에도 잘 알려져있는 오싱의 작가다. 고 스가코는 전쟁을 직접 결정한 사람뿐 아니라, 군수물자를 생산하여 간접적으로 참여한 사람도 전쟁에 책임이 있다고 하여 일본사회에 충격을 안겨준 분이다. 책 속에서도 오싱의 장자가 죽는 부분에 대해, 전쟁에 참여한 사람을 벌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군국소녀로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자랑스럽게 일했고, 가미가제의 희생양이 될 사람들에게  고향으로 가는 증명서를 발급했던 자신에 대해 반성하는 성찰이 담겨있는 “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번역된 일본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면 일본 정치인들의 행동과 언행을 좋아하지 않는 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국 정치인들의 막장드라마 같은 사고방식과 비슷한데도 말이다.  

  90살에 이른 “저자가 생각하는 죽음”을 들여다 보며 역시 죽음과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장 한없이 가벼운 죽음”에서도 전쟁을 치르던 일본을 “살아있는 것이 기적인 시절”이라고 하며, “아아 어머니 차라리 잘 돌아가셨어요.”라고 생각하던 어린시절을 떠올리며, 전 후 일본에서 “청춘이 없던 청춘시절”을 보낸 자신을 회상하며, 인절미를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달은 자신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역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장 생명은 누구의 것인가?”에서는 “2류를 추구하며, 시나리오를 쓰는 삶을 정리하며 돌아본다. 차심부름이나 하려고 시나리오 회사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자신을 만족스럽게 되돌아본다. ”3장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인가?“에서 여성이어서 남편에게 받았던 부당한 대우를 감내하며 시나리오를 쓴 자신을 회상한다. 시월드의 시어머니, 쑤기미 할망구와 올케들에 대해 싫지만 받아들이는 순종적인 자세를 볼 수 있다. ”무자식 상팔자“에서도 집과 가족에 인생을 바친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도 모른다고 표현할 정도로 외롭고 힘든 사람이었다. 같이 있기만해도, 서로에게 힘이 되고,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따듯해지는 ”가족이 경험이 없는“ 불쌍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족하면서, 혼자 살지만 외롭지 않다고 하며.. 살아있는 동안에는 건강하게 살고 싶다며, 단백질 섭취와 운동을 매일하며,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혀 느긋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자신을 ”연애는 못했지만 하기는 귀찮다.“고 하며, 자신의 늙은 상태에 대해 자각한다.

”4장  나는 안락사로 죽고싶다.“에서는 즐겁게 지내며, 깔끔하게 헤어지는 크루즈 여행같은 삶을 먼저 이야기 하고, 안락사에 대해 이야기 한다. ”5장 죽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로“에서도 ”내 집에서 죽고싶다.“고 이야기한다. 바꿔 말하면 내 집에서 죽을 때까지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드라마를 쓰면서도 ”등장인물을 죽이기는 싫어”한다. 죽음보다 괴로운  생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안락사의 선택지를 주는 의료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살아있을 때 명확한 의사표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6장 죽음을 바라보며” 살아있을 때 “ending note”를 작성하며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하며, 치매라도 본인과 가족이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하며, 평안하고 즐겁게 죽고 싶은 소망을 말한다. 남편의 기척이 느껴지는 집에서 “잠들 듯이 행복한 죽음을” 맞이 하는 삶을 꿈꾼다.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저자는 편안하게 죽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삶을 꿈꾼다. 분명히 말하건데, 저자는 안락사에 대한 정치적인 견해를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삶을 담담히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의 애처러운 삶에 대한 동정도 하지 않는다. 자신이 쓴 텔레비전 드라마도 드마마틱한 삶보다 일상적인 삶을 추구하며,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쓴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작가는 잘못한 것을 반성할 줄 아는 지식인이다. 내가 애처러워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에세이류의 책은 잘 읽지 않는다. 공감할 때는 소설처럼 즐겁게 읽을 수 있지만, 공감하지 못할 때는 과감히 집어 던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즐겁고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그렇다고 다른 분에게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이미 다른 책들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수천년 전부터 이야기해 온 주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삶의 소중함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죽음을 맞기 전의 삶을 정리하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한다. “살아 있을 때” 연명치료의향서를 서류로 남겨 적극적 존엄사를 선택하고, “살아있을 때” 건강을 위해 단백질을 섭취하고 규칙적인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살아있을 때” 크루즈 여행처럼 즐겁게 지내고 깔끔하게 헤어지라고 말한다. “살아있을 때” 느긋하게 죽음을 기다리고, 나에게 없는 것을 추구하지 말고,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상팔자를 만들라고 충고한다. “살아있을 때” 마지막이니 담배라도 마음껏 피우라고 남편을 속인다. “살아있을 때” 함께 지내온 시간을 상징하는 롤렉스 시계를 묘 속에 유골대신 넣으라고 충고한다.

   저자는 남편이 살아있다는 생각하는 정신병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내용은 삶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불교의 정토종이 자신의 종교라고 밝혔다. 불교에서 죽음은 삶의 한 부분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무상하고, 영원하지 않으니 “집착”에서 벗어나 현재를 잘 살아가라고  가르친다. 죽음은 다시 태어나기 위한 “윤회”의 한 과정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니 현세의 삶에서 나쁜 업을 쌓지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생사의 순환으로 받아들이라고 한다. 불교 역시 잘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하기 위해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죽음이 주체가 아니라 “현재의 충실한 삶”이 주체라고 가르친다.

  나는 크리스찬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크리스찬이라고 한다. 예수도  “하느님”이 내린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러니 너희도 두려워하지 말고 현세의 삶을 살아가라고 가르친다. 부활이라는 사건 앞에서 십자가에 달리는 시련과 고통, 그리고 죽음이 있다. 제대로 살려면 시련과 고통,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죽음을 더 많이 강조하며, 부활할 것이니 모든 것을 나에게 바치고 스스로 죽으라고 죽음을 강조하는 종교를 우리는 사이비라고 부른다.

  내 삶의 태도는 사이비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죽음과 고통이라는 단면이 더 크게 보인다면 내 삶은 사이비다. 그러므로 사이비가 되지 않게 고통과 죽음을 생각하며 현재의 내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 하시다 스카코는 가족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 “집과 가족에 인생을 바친 탓에”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모른다고 이야기했지만,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가족인 소중하지 않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어떻게 잘 살아야 할까? 이미 수천년 전에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아닌 남을 사랑하는 삶이  자신을 잃어 버리는 삶이 아니라 진짜로 자신을 사는 삶이라고 말한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이 내일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 것이 나 다운 삶이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면 “새날”이 열려 밝은 아침이 올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새맘”이 열려 따듯한 내일을 맞을 것이다. 이 예언은 하나도 틀리지 않고 모두 맞을 것이다. 내가 책을 통해 읽은 과거의 세상에서 그랬듯이, 미래의 세상에서도 언제나 그럴 것이다.